1840년대에 미국의 치과의사였던 '호레이스 웰스'와 '윌리엄 모턴'은 함께 참석하게 된 파티에서 당시에 '웃음가스'로 알려진 아산화질소를 사람들이 들이마시면, 상처를 입어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다가 가스의 효과가 사라진 후에야 다쳤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고 그 효과에 주목하게 된다. 그 후 웰스는 자신에게 직접 아산화질소를 실험하여 확신을 얻었으며, 1845년 보스턴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새로운 흡입마취제에 대한 공개시연을 준비했다. 하지만, 실험자에게 아산화질소가 부적절하게 투여되어 발치환자가 고통스러워 하며 비명을 질렀고, 이 사건으로 웰스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며 모든 것을 잃고 미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시연장에서 아산화질소 대신 '에테르'를 사용해 보라는 조언을 들은 조수 모턴이 1년 동안 연구를 거듭하여, 1846년 웰스와 같은 장소에서 디에틸에테르를 사용한 공개시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으며, 새로운 마취법의 시작을 알렸다.
또 1860년대에 '죠제프 리스터'에 의해 소독법이 창안되어 근대외과가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고 'Brown Sequard', '존 헐링스 잭슨', '윌리엄 가워스'와 같은 신경학자의 배출로 신경학도 많은 진보를 보임으로써 근대 신경외과학의 탄생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1861년 브로카는 좌측 전두엽에 언어중추가 있다고 발표하여 '운동성 실어증'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독일의 신경과 의사 '에두아르드 히치히'와 해부학자 '구스타프 프리치'는 개의 뇌표면에 여러 곳을 전기자극 하던 중 어떤 일정한 부위를 자극하면 반대쪽 사지의 여러 근육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후 4년 뒤에는 Barthalow는 운동피질을 발견하여 뇌의 어느 국소와 이에 관련되는 기능을 연구하는 미지의 분야에 문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에는 뇌의 국소마취학, 소독법이 시작되면서 많은 외과의가 뇌수술을 시도하였으나,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과 좌절을 금치 못하였고 뇌수술은 일시적인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경학자와 외과의는 꾸준히 이 방면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오늘의 신경외과학을 이루게 되었다.
19세기 후반기에 신경외과학의 태동기를 주도해 온 것은 영국의 외과의사들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외과의사인 '윌리엄 마퀴인'은 소독법 하에 1888년까지 뇌농양 환자가 대부분인 21명의 두개강내 질환에 대해 두개골 절제술로써 18명을 치유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질환은 모두 두개골에 변화를 일으켜, 쉽게 병소의 위치를 수술 전에 알 수가 있었던 사례였다.
최초로 신경학적 증상에 의거하여 뇌종양의 위치를 추정하고 수술을 시행한 사람은 '고들리'였으며, 이때부터 뇌종양 수술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고들리가 수술한 뇌종양의 해부학적 위치를 정확히 알아낸 사람은 '베넷'이었는데 그는 통증제거를 위하여 신경후근 절단술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당시에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은 런던의 '빅터 호슬리'인데 임상분야뿐만 아니라 실험적 신경외과학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98년 척수강내 종양을 수술로써 절제하였고 1891년 삼차신경통 치료를 위해 삼차신경절후 신경절단술을 처음 시행하는 등 신경외과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경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뇌정위 고정장치를 '클라크'와 함께 1908년에 고안하여, 실험적인 두개강내 수술에 사용하였고 또 수술할 때 두개골 부위의 출혈을 본 왁스(bone wax)로 지혈하기 시작했다. 유럽 사람들은 그를 신경외과의 선구자로 기억하고 있으며, 미국의 쿠싱에 앞서 현대 신경외과학의 토대를 닦은 의사임은 분명하다.
호슬리를 포함한 당시의 외과의들은 뇌수술을 할 때 떼어낸 두개골을 버렸는데, 1889년 '와그너'는 골 성형적 개두술을 창안하였으며, Obalinski는 산부인과 수술 시에 치골을 절단할 때 쓰는 Gigli의 줄톱을 써서 이 수술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었다. 그 후 허드슨은 오늘날에도 신경외과 의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천두기를 고안해서 오늘날의 골 성형적 개두술이 완성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Spiller는 1901년 Frazier를 지도하여 삼차신경절후 신경절단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였으며, 10년 후에는 Martin을 지도하여 악성종양으로 심한 하지통증이 있는 환자의 척수신경로 절단술을 최초로 성공시켰다.
상기와 같이 금세기 전환기에 있어서 신경학이나 신경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신경계질환의 수술적 치료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술결과는 좋지 않았다. 신경계에 온 정열을 쏟았던 호슬리조차 1880년 뇌수술 44례 중 10례의 사망을 보고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다행히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에 근무하던 젊은 외과의사인 쿠싱은 신경계 질환의 외과적 수술에 관심을 갖고 그의 전 생애를 이 학문발전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쿠싱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미국 외과의 석학이며, 수술할 때 소독된 고무장갑을 최초로 쓰기 시작한 Halsted의 문하에서 훈련을 받아 후일 쿠싱이 뇌수술을 하는 데 있어서 기초가 되었다. 그는 존슨 홉킨스 대학에서 신경계 질환에 대한 외과적 수술로 명성을 얻자 1910년 하버드 대학의 외과교수로 초빙되었고, 1912년 4월 30일 보스턴의 Peter Bent Brigham 병원이 개원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신경외과를 표방하고 신경계에 대한 수술만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경외과가 정식으로 독립하여 설립되었다. 그 후 그는 유년기에 머물던 신경외과학을 성장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쿠싱이라는 이름은 신경외과 영역에 있어서 수술, 질병, 징후 및 법칙 등에 14곳 이상이나 붙어 있다. 쿠싱의 중요한 업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신경계 수술방법의 체계화와 해박한 신경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병소의 정확한 국소진단이다. 그의 수술 이환율과 사망률은 아주 적었으며, 1915년에 발표된 수술 사망률 8.4%는 당시 타 병원의 30~50%에 비교하면 경이적인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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